고구려가 멸망당할 뻔했던 전쟁을 알아보자(스압)

*선요약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이끄는 위나라군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구려는 맞서 싸워서 2번이나 이겼으나 결국에 패배하여 수도를 함락당하고
동천왕은 피신하여 급기야 위나라군의 추격을 받게된다.
그럼에도 불구, 동천왕의 충신들이 지혜를 발휘하여 고구려의 존망이 기로에 섰던 상황에서
멸망당할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동천왕이 즉위할 당시 고구려와 그 주변국을 나타낸 지도)

(동천왕, 227~248년 재위)
동천왕이 즉위할 무렵인 서기 227년
중국은 위, 촉, 오의 삼국으로 나뉘어 쟁패를 다투고 있었으며,
여기에 요동 땅에는 공손씨 정권이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종종 고구려와 충돌하고 있었다.
또한 공손씨 정권은 동천왕의 아버지인 산상왕의 즉위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을 이용하여
발기(發岐)를 지원하면서 고구려를 침공하기도 했다.
동천왕은 이런 국제 정세를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고구려의 대외전략을 새롭게 짜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233년 오나라는 위를 협공하기 위해 공손씨 정권에 사신을 보냈는데, 공손씨는 이들을 가두어버렸다.
그 중 일부가 탈출하여 고구려로 도망하였는데, 동천왕은 이들을 잘 대우하고 오나라로 보내 우호의 뜻을 드러냈다.
이에 오나라 손권은 고구려를 새로운 파트너로 삼기 위해 235년, 236년 거듭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한편 234년에 촉의 제갈량(諸葛亮)이 사망하면서 한숨을 돌린 위나라는 후방 기지로 삼기 위해 동방으로 눈을 돌렸다.
234년에 위나라가 고구려에 먼저 사신을 보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위, 촉, 오 삼국은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 후방 기지를 확보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촉의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한 것도 그런 의도에서였다.
이제 위나라의 힘이 요동지역으로 밀려오자, 고구려 및 공손씨 정권도 이에 대응하는 전략을 구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구려로서도 위나라와 오나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때 동천왕은 위나라를 선택했다.
아마도 고구려와 충돌이 잦았던 공손씨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위나라와 화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동천왕은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내 자신의 뜻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6년에 오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요동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위를 견제하기 위한 고구려의 전략적 위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천왕은 이러한 위와 오의 정세를 잘 이용하면서 공손씨 정권을 견제하고 있었다.

236년에 위나라는 지략이 풍부한 관구검을 유주자사에 임명하여, 공손씨 정권을 압박하였고,
238년에는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관구검 군대와 합세하여 공손연을 토벌하였다.
이때 동천왕도 군사 1000명을 보내 위나라 군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공손씨 정권이 무너진 뒤 위나라는 오히려 고구려에 대해 견제책을 취하면서,
낙랑, 대방군을 통해 동방의 여러 세력에 대해 통제력을 강화해갔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위 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이에 대해 동천왕은 242년 압록강 하구의 요충지인 서안평을 공격하였고 이를 통해 요동과 낙랑을 잇는 교통로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당시 촉의 강유(姜維)가 북벌을 재개하여 위를 침공하는 틈을 노린 군사 전략이었다.
동천왕이 중국의 분열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는 안목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동천왕의 신하 득래는 동천왕이 중국을 침입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수차례 간하였으나(아마 공격을 말린 모양인듯),
임금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탄식하면서 "머지 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참혹상(慘酷相)을 목도하리라."라고 말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고 이내 굶어죽었다.

(관구검)
244년, 위협을 느낀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관구검은 여러 길로 나누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 중에서 관구검이 직접 거느린 군대는 보병,기병을 총합해 1만에 상당했다.
관구검은 속전속결의 전술을 택했고
그에 따라 고구려의 부수도인 국내성과 가까운 비류수로 군대를 진격시킨다.

"(동천왕 재위)20년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玄?)에서 나와 침입하였다.
임금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병사를 이끌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싸워, 또 이겨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中-
동천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군의 침입에 맞섰다.
그 결과, 고구려군은 비류수와 양맥곡에서 1만여명의 위나라군중 총 6000여명을 썰었고,
이 전투에서 남은 위나라 병력은 4천명 뿐이었다. 관구검은 급히 퇴각한다.
2연승을 거둔 것에 감격을 받은 동천왕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위나라의 대병이 오히려 우리의 소병만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 그의 목숨은 나의 손아귀에 달려 있도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中-
그리하여 한번만 더 싸우면 완승할 것이란 기대감에 들떴는지,
동천왕은 막는데 그치지 않고 5,000여명의 철기군을 지휘하여 관구검을 추격하였다.

"관구검이 방(方)형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임금은 기병 1천여 기병을 데리고 압록원(鴨?原)으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中-
그런데 쥐를 너무 궁지로 몰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았던가.
관구검이 결사적인 방진을 쳐서 고구려군에 저항한다.
동천왕과 철기병이 무리하게 관구검을 추격하다
결국 관구검이 쳐놓은 방진에 걸려 20,000명의 고구려군중 18,000여명이 도륙되어버리고
동천왕은 겨우 1천여명의 기병을 데리고 급히 퇴각한다.

"구려왕(句驪王) 궁(宮)이 보기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웠으나,
궁(宮)이 연달아 격파되어 패주했다.
그리하여 관구검이 속마현거(束馬縣車)하여 환도에 올라 구려(句驪)의 도읍을 도륙하고 수천명을 참획했다."
-《정사 삼국지》위서 관구검전中-
*구려(句驪) : 고구려
**궁(宮) : 동천왕
***속마현거(束馬縣車) : 말발굽을 싸매 미끄러지지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게 함.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산길을 행군하는 것을 묘사한 것임.

고구려군 만만치 않게 피해를 입은 관구검쪽은 일단 후퇴를 한 뒤
다시 군대를 추스려 죽을 각오를 하고, 고구려의 수도 환도산성을 노렸다.
관구검은 고구려의 대군이 궤멸돼 전력이 허술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험한 산세의 압록강 중류 지역에 있는 고구려의 도읍 환도성은 도달하기까지
험한 산세로 어려웠고 천연한 요새화 탓에 함락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구검의 험한 산로를 행군해 환도성을 기습해서 함락한다.
위나라군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도산성을 함락시키고 1만여명에 달하는 군사와 백성을 죽였다.
거기다 '관구검기공비'를 세우고 환도성을 방화하고 불내성(不耐城)이란 글귀를 남겼다.
그러나 관구검 군대의 추격에 혼비백산한 동천왕은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이로서 관구검은 수도는 함락시켰지만 제일 중요한 동천왕을 놓친 것이다.
(관구검기공비는 1906년 길림성 집안현에서 발견된다.)

“다시 고구려를 치자 궁(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태수(玄?太守) 왕기(王?)를 보내 추격하게 하니
(왕기가) 옥저(沃沮)를 지나 천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中-
관구검은 왕기를 보내 옥저로 달아난 동천왕을 추격하게하고
환도성의 산성의 험준한 지세에 머물러 왕기의 후방을 지켜주고 고구려의 지방군들을 견제한다.

(왕기)
"관구검이 구려(句麗)를 치자 구려왕 궁(宮)이 옥저로 달아났고 이에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천여 급을 참획하니 궁이 북옥저(北沃沮)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로 남옥저와 8백여리 떨어져 있고…
(중략)…왕기(王?)가 따로 군대를 보내 궁을 뒤쫓아 공격하여 북옥저의 동쪽 경계 끝까지 다다랐다."
-《오환선비동이전》동옥저 조中-
왕기는 추격하여 남옥저에 당도하여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천여명을 베어죽여버렸다.
그러나 동천왕은 남옥저에 없었다.
동천왕이 거짓으로 남옥저에 갔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고
북옥저로 피신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기는 군대를 따로 나누어 북옥저에도 위나라군을 보낸다.
이렇게 하여 위나라의 군대는 세 갈래로 갈라졌다.
환도성의 관구검 군대, 남옥저의 왕기의 군대, 북옥저의 왕기의 선봉장이 이끄는 군대.
한편 왕기가 거침없이 추격을 해 오는 것을 직감한 동천왕은
북옥저로 피신은 하였지만 막다른 골목에 처한 셈이었는데...

"관구검이 환도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기(王?)를 보내 임금을 쫓았다.
임금은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지고, 오직 동부(東部)의 밀우(密友)만이 임금의 옆에 있다가 임금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병이 매우 가까이 닥쳐 있으므로 이 형세를 피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죽을 각오로 적군을 방어하면 임금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과 함께 적에게 가서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임금은 간신히 빠져 나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스스로 호위하였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中-
밀우는 자신이 결사대를 모아 필사적으로 왕기가 이끄는 위나라군을 막겠다고 결심했다.
즉, 밀우는 본인의 몸을 바쳐 동천왕의 도주시간을 확보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밀우는 결사대를 모아 항전하였고
이후 동천왕의 충신 유옥구가 전쟁터에 쓰러져 있던 밀우를 구조하였다.
동천왕이 손수 오랜시간 간호한 끝에 깨어났다고 한다.
"임금은 사잇길로 여러 곳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의 추격은 멈추지 않았다.
임금은 마땅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꺾이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동부 사람 유유(紐由)가 나와 말하였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들을 위로하면서 틈을 엿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이 성공하거든 임금께서는 적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승부를 결정지으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좋다.」
유유가 위나라 군대로 들어가서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몸을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의 진영 앞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법관에게 목숨을 맡기려고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사는 마침내 혼란에 빠졌다.
임금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그들을 갑자기 공격하니, 위나라 군사는 동요하며 진을 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에서 물러갔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中-
밀우에 이은 충신 유유의 계략으로 왕기의 선봉장을 암살하는데 성공했고,
그때문에 위나라군은 혼란이 왔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동천왕은 군사를 모아 기습을 했고
북옥저까지 추격해온 위나라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동천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위나라 군대들을 친다.
여러군데로 흩어진 위나라군은 먼 길을 달리느라 지쳐서 힘을 합추지 못한 탓인지 패배하고 만다.
"(고이왕 재위)13년(서기 246)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삭방태수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임금이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경을 습격하여 백성을 잡아왔다."
-삼국사기 제24권 백제본기 제2中-
게다가 마침 겨울 10월이라 계절이 추울 때였다.
그렇기에 지휘관을 잃은 위나라 군대들은 더더욱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사태가 매우 불리해지자
관구검 등 위나라군은 북쪽 길이 고구려 지방군에 의해 모두 막힌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급히 낙랑 방면으로 도주하였으나
마침 백제의 고이왕이 낙랑태수 유무가 동천왕을 잡으러간 때를 틈 타
고구려 구원에 나서서 낙랑군을 공격하던 때였다. (빈집털이 ㅍㅌㅊ?)
이에 놀란 관구검은 고이왕을 피해 요동으로 도망간다.
결국 관구검은 결전 끝에 동천왕에게서 고려하지도 못한 반격을 맞고
동천왕에게 빼앗긴 서안평도 수복치못한 채 도주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멸망당할 뻔한 위기는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동천왕은 관구검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감에 넘쳐 추격하던 나머지 정예병과 같은 철기군 5,000여명을 포함한
18,000여명의 군사를 잃은 사례가 있어 추격공포증에 걸렸던 것 같다.
이로서 고구려는 수도와 국토 전체가 유린되고 왕이 옥저로 달아나야 했을 정도로 가히 고구려 역사를 통틀어서 최악의 패배를 겪었고
결과적으로 보면 동천왕의 서안평 공격은 위나라를 자극하여 환란을 불러온 오판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천왕의 서안평 공격은 당시 국제 정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를 고구려의 대외전략에 이용할 줄 아는 탁월한 안목의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후일 미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하고 이어서 낙랑, 대방군을 병합하였는데,
이러한 대외전략을 이미 동천왕이 마련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21년(서기 247) 봄 2월, 임금은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집이었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中-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은 고구려가 백제와 협공하여 평양성을 점령하였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낙랑 방면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력이 매우 세졌다는 것이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
고구려 왕조의 사관들은 평양성 천도의 정통성을 좀 더 올리기위해서
동천왕 때 평양성을 제2의 수도로 한 것처럼 끌어올려 적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고구려와 위나라의 치열한 전쟁인 일명 '비류수 전투'의 전개도)
위기를 모면하게 한 밀우,유유 그리고 밀우를 구한 유옥구에게는 포상이 주어졌다.
밀우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주고,
유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을 식읍으로 주었다.
유유에게는 벼슬을 더하여 구사자(九使者)로 삼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쉽게 말해서 밀우와 유옥구에게는 토지를 하사했고
유유는 특진을 시켜주었고, 유유의 아들은 관리로 특채한 셈이 되겠다.
천도한 후 1년 뒤인 서기 248년 2월에 동천왕은 죽게 된다.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생각하고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했다.
가까운 신하 중에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는 무리가 많았다.
새로 즉위한 임금이 예가 아니라 하여 순장을 금지하였으나,
장례일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무덤에 와서 자살한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섶을 베어다 그들의 시체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그곳을 시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관구검은 오나라 방면으로 사실상 좌천을 당한 후에
서기 255년 위나라의 사마사에게 대항해 반역을 벌이다 패하여 달아났다.
그리고 도주중에 화살에 맞아 죽었고, 시체는 참수당하고 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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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긴 글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