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다.
자식의 학벌은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무관심과 할아버지의 재력이 결정한다.
엄마의 정보력이란 열성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나는 2013년에 한번, 그리고 올해 한번 총 두 번 수능을 쳤다.
새벽이라 그런지 짧게 이 4년동안의 생각을 적어보고 싶다.
어머니는 열성적이셨고 아버지는 무관심하셨다.
학원비는 매달 60~150만원씩 쓴 것 같다.
6시 20분에 일어나고 16시에 학교가 끝나면
그 사이에 학원 숙제를 하거나 베끼고
19시까지 학원을가고 22시에 끝나서 집에 오면 23시
이랬던 것 같다.
2013년을 돌이켜보면
동선낭비도 심했고
학원에서 낭비하는 시간도 많았고
보던 교재도 별로 좋지 않았고
멘탈도 건강하지 않았고
공부방법도 지금에 비하면 많이 미숙했다.
갈수록 사람들과의 갈등도 심해져서
6월 모의고사에서 전국 백분위 7%를 떨구고 지망하던 대학을 모두 못 갔다.
인터넷 공간에서 부모님을 비판하는게 자기 얼굴에 침뱉기라는 일도 잘 알고
이 말이 핑계처럼 들릴 각오도 하지만 내가 그 당시 원했던 성적을 얻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제일 잘 알고있다.
문제를 맞추기 위해서는 1. 쌓아놓은 지식으로 2. 올바른 생각을 거쳐 3. 올바른 방법으로 풀어야한다.
'6시 40분부터 23시까지 이어지는 스케줄을 잘 소화해야 하는가?'
'하루에 최소 6시간 이상 공부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들은 수능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을 우리 가족은 심각하게 다루었고
우리 모두 이 질문에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행동으로 옮겨야한다는 부모님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못 하겠다'며 맞섰다.
이 때문에 13년 수능이 끝나고 18년을 곧 맞이하는 지금까지도
나는 일종의 죄책감을, 부모님은 나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나를 똑똑하지만 불성실한 인간으로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13년 수능이 끝나고 한국을 떠나 3년 동안 외국 생활을 했다.
3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얘기해보도록 하자.
올해 3월, 외국에서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군대와 인턴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다시 욕심이 생겼다.
대학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공부 방법을 보고 비교해보니
13년의 나는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어떻게 했었어야했는지 알 것 같았다.
수능이 개편되서 공부량이 부담스러운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을 설득했다.
부모님도 같이 사는게 낫지 않겠냐며 흔쾌히 동의하셨다.
큰 목표가 있었다.
수능 만점.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라는 농담 속에 숨은
사교육비, 학업 스트레스, 가족과의 대화 단절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과도한 공부량이 고득점의 필수조건'이라는 생각을 깨고 싶었다.
17년의 나는 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더 믿었다.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4~5시간이었고, 초 단위까지 체크를 했다.
유투브를 검색하다가 찾은 '딥 워크'라는 책도 내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이 책이 피실험자들의 뇌파를 측정해가며 얻은 결론은 우리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매우 짧고
나머지 시간은 내일을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일반인이 하루에 집중 가능한 시간은 보통 한 시간.
훈련된 사람은 4~5시간.
그리고 극히 선택된 일부는 6시간~8시간까지 할 수 있다고 한다.
깊은 영감을 받았다.
'책을 쓰자.'
'수능 만점자가 되서 책을 쓰자.'
'13년의 나처럼 재능 있는 학생들이 과도한 공부량과 수업량에 치여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해보자.'
'그를 위해서는 치열한 자료 수집과 탄탄한 논증도 물론 필수겠지만 내 학력이 제일 중요하다.'
'학벌이 능력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못하지만 세상이 그렇다면 보여주지.'
4월, 도서관에서 나만의 첫 모의고사를 봤다.
국어 70 수학 50 영어 96
6월 모의고사는
국어 89 수학 92 영어 100.
13년의 수능보다 훨씬 더 적게, 하지만 훨씬 더 밀도있게 공부했고
학원은 아예 다니지 않고 인터넷 강의로 대체했다.
재미있게 공부했다.
매일 모의고사를 풀었다.
공부를 끝내고 나면 항상 배가 고팠다.
나만의 방법을 만들어가며 풀이법을 세웠고
부족한 배경지식은 호기심을 통해 빠르게 확장되었다.
어머니는 지지해주셨고 아버지는 나의 공부량을 못 미더워하셨지만 그래도 믿어주셨다.
상관 없었다. 이 방법이 맞는 방법인걸 알고 있으니까.
공부를 하다보니 유투브 채널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도 생겼다.
'EBS 풀이는 이렇게 풀었는데 이 방법으로 푸는게 훨씬 더 깔끔하네.'
'만약 유투브 채널을 만들면 이건 이렇게 설명해야겠다.'
꿈이 있었다. 그리고,
9월 모의고사, 긴장되서 3시간만 자고 쳤다.
국어 91 수학 96 영어 100 탐구 50 42.
국어가 마음에 걸렸지만 3시간 밖에 자지 못했으니 괜찮다고 여겼다.
국어 공부시간을 늘리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수학 마지막 30번 문제도 거의 근처에 갔다가 틀린거라 열심히 공부했다.
탐구도 빈틈을 좀 더 메우면 될듯 싶었다.
그리고 수능.
91/89/100/47/44
등급은
2/2/1/2/2.
9문제.
내가 틀린 이 9문제가 지금도 머릿속에서 맴돈다.
국어 5점 수학 7점 탐구 3점, 총 15점을 아주 단순한 실수로 날렸다. （나머지 14점은 실력이다.）
7개월 동안 준비하면서 200번은 넘게 반복한 작업들이었는데...
한번도 하지 않은 실수들도 나왔다.
수능이 끝난 첫날.
어머니는 날 위로해주셨고 아버지도 괜찮다고 하셨다.
둘째날.
어머니는 날 내버려두셨고 아버지는 정신 차리라고 하셨다.
그날 밤 새벽, 처음으로 화장실에서 담배를 폈다.
하필이면 아버지는 새벽에 화장실을 쓰셨고
화장실 문 너머 들리던 핀잔은 화장실 문이 열리고 "아이씨"라는 말로 바뀌었다.
많은 의미가 있었다.
셋째날.
어머니는 논술은 잘 쳤냐고 물어보셨고 아버지는 술에 취하셨다.
"한 마디만 해도 되냐?"
"내일 술 깨면 해."
그래도 대화는 시작됐다.
편집된 기억이라 작은 따옴표로 옮기겠다.
'한 시간만 더 하지.'
'실수도 실력이야.'
내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내가 고3때 개처럼 공부했는데 왜 그때는 지금보다 성적이 안 나왔는데 그럼"
'너가 언제 공부를 개처럼 했냐.'
'골프도 1등부터 100등까지 다 똑같이 잘 쳐.
걔네들이 실력이 모자라서 우승을 못 하겠냐.'
2007년부터 13년까지의 내 인내（보통 수능을 12년 공부라고 하지만 내가 참고 공부했던건 6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올해 7개월동안의 노력이
화장실에 남아있던 담배 냄새 때문인지,
그날 아버지가 드셨던 술기운 탓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사소하게 정의되고 간단하게 폄하되는걸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다.
골프.
채로 공 넣는 그 게임.
그래 그 골프.
나의 관심에는 없고 당신의 관심에는 있는 그 골프.
그래 그 골프.
골프하니 타이거 우즈가 2m 퍼팅을 못 넣어서 우승을 놓친 일이 생각난다.
누구도 타이거 우즈에게 노력이 부족해서 그 퍼팅을 못 넣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왜?
타이거 우즈니까.
그에게 그 퍼팅은 식은 죽 먹기라는걸 아니까.
그의 실력이 모자랐거나 그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트로피의 무게가 무거웠다는 것을 다들 공감하니까.
또 누구라도 골프 황제를 공감하고 싶어하니까.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그 15점이 식은 죽 먹기라는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작 해야 친구 하나 둘 정도.
나를 공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얼마 없다.
나는 타이거우즈가 아니라, 13년에도 '실패한' 무명의 골프 선수니까.
그런데 가장 가까운 사람의 공감도 사지 못할만큼 나의 죄는 큰가.
방 한 켠에 내 무릎 높이만큼 쌓인 책들이 나를 부질없이 쳐다본다.
취하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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